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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감찬 장군에 대해서

최덕근 2014. 11. 5. 19:20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姜邯贊) (948~1031)

 

사진자료: doopedia

 


귀주대첩도 


 

 

문곡성의 기운을 타고난 강감찬(장군)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고려의 영웅 강감찬 장군은 금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강궁진은 신라의 귀족출신으로 태조왕건이 즉위하던 시절 높은 벼슬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든 그는 벼슬자리에 물러나 한가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늘 거란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늘 걱정스러워 했었습니다. 그 해 조정에서는 거란의 움직임에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염탐꾼을 보냈습니다. 거란에 대해 살피고 온 염탐꾼은 정종에게 고했습니다. '거란이 출전 준비를 하려고 했을 때 이름난 점쟁이가 지금 군사를 일으키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여 단념했다고 하옵니다.' 이 소식은 백성들에게 전해졌고 이 소식을 들은 강궁진은 안심했다고 합니다. 948년 어느 날 이었습니다. 승주 목사로 부임해 가는 김장길이 하인과 함께 길을 지나고 있었을 때 였습니다. 그 때 유난히 큰 별 중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본 김장길은 '저 별은 틀림없이 문곡성일거야' 말하며 그 별을 향해 쫒아갔습니다. 그 문곡성이 가르키는 집은 강궁진의 집이었습니다. 저 집이 삼한벽상공신(왕건이 고려를 세울 때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호) 강궁진의 집인것을 안, 그는 다음날 강궁진에게 '그 집 아이는 문곡성의 기운을 타고났습니다' 라고 알렸습니다. 김장길은 그러면서 '이다음에 아기가 크면 개경에 있는 저희 집에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강궁진은 김장길을 베웅하며 자신의 아들이 문곡성의 기운을 탓다는 점에 매우 기뻐했습니다.

 

적지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다.

강감찬의 아명은 은천이었습니다. 7살 때 강감찬은아버지로 부터 글 공부와 무예를 익혔습니다. 어느덧 강감찬이17살 때 아버지 강궁진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강궁진은 죽기 전 아들에게 개경에 사는김장길에게 가보라고말하였습니다. 강감찬은 김장길에 찾아가 양자가 되었습니다.김장길은 강감찬을총애하며 강'감찬'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어느덧 청년이 된강감찬은 10년 동안 세상을 두루 보고 싶어 김장길에게 허락을 맡았습니다.강감찬을 총애하였기에 김장길은 보내주기 싫어했지만 결국은 승낙해주었습니다, 10년동안 강감찬은불경을 공부하기도 하고 농촌일도 도맡아하고 천문,지리,풍수학 까지 공부하였습니다.10년 뒤개경을 들어온강감찬의 나이는 30이 넘은 뒤였습니다.김장길은 그 때 큰 병이 들어있었습니다. 김장길은 강감찬에게 '나라를 위한 일을 해보거라' 라는 말을 꺼낸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983년 12월 성종 2년 강감찬은 나라를 위한 일을 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그러고 적지 않은 나이 36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제술과 장원급제) 강감찬 장군은 제술과 급제를 했습니다.고려시대엔 무인을 뽑는 무과가없었습니다. 그래서강감찬 장군은 무인이 아니라 문인이라고 합니다. 당시 문인들이 군사지휘권을 독점했기때문에 강감찬 장군이 문신이면서 전장터를 누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란이 쳐들어오다.

993년 동경유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거란으로 쳐들어왔습니다. 80만이라는 병력이 쳐들어왔다고 믿은 고려조정은 항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부분이 였습니다. 하지만 강감찬과 서희는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성종을 설득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적의 협박에 땅을 조금씩 조금씩 내주고 항복한다면 결국엔 이 강산은 적의 손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항복해선 아니되옵니다' 이르어 왕에게 이르니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거란과 싸우기로 승낙했습니다. 거란의 1차 침입은 서희의 담판으로 소손녕은 물러나게 됩니다. 995년 고려군은 압록강 이북을 수복하여, 성을 쌓으니 이것을 강동6주라고 합니다. 어느덧 강감찬이 50이 되었을 때 (997년) 성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어 7월 서희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종과 서희가 세상을 떠나자 강감찬은 '누가 나라를 지킬 것인고' 걱정을 하였습니다. 1009년 강감찬이 62세 때 강조의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권력을 남용하고 목종을 죽이려하자 강조가 정변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랬던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우고 말았습니다. 대량원군은 8대 임금 현종이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거란 왕 성종이 분노하여 1010년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왔습니다. 강조는 이 사실을 듣고 30만의 대군을 데리고 통주(평안 북도 선천)로 대진하였습니다. 초기엔 검차와 강조의 지략으로 거란군을 대파하였지만 이 승리에 자만해 거란군을 얏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이용한 성종이 여러지역을 침입해 교란작전을 펼쳤습니다. 강조는 이 사실을 알았지만 별다른 대책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성종은 다른 지역을 무너뜨리고 강조군을 일시에 쳐 강조를 붙잡았습니다. 강조는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강조가 죽자 고려 현종은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하였습니다. 이 때도 항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강감찬은 이 때도 싸울 것을 주장하며 왕에게 간하였습니다. 현종은 이를 받아들여 싸울 것을 거란 왕에게 알렸습니다. 강감찬은 현종을 남쪽으로 피신시키고 거란군을 전투를 벌였습니다. 개경이 함락되고 전투가 잇다렀지만 고려군은 거란군에게 밀리지 않았습니다. 거란 성종은 싸움이 장기화가 되자 고려와 화친을 맺고 싶어했습니다. '고려 현종은 거란 왕에게 입조하라' 라는 조항을 넣어 화친을 맺고 거란은 물러갔습니다.

 

귀주에서 적을 무너뜨리다.

이듬해 거란 왕 성종은 현종에게 거란으로 입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현종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습니다. 또 성종은 강동 6주가 탐이나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핑계를 대며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1018년 이를 구실로 소배압은 10만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왔습니다.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해 거란군을 막게 했습니다. 강감찬은 홍화진에 쇠가죽 둑을 쌓아 물을 비축해두었습니다. 그리고 거란군이 강을 건너자 강감찬은 둑을 일제히 풀었고 거란군을 모조리 수장시켰습니다. 한편 소배압은 홍화진을 피해 개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먼길을 온 탓인지 군사들은 피로감에 지쳐있었습니다. 결국 소배압은 개경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후퇴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소배압의 거란군이 귀주에 다다를 때 고려의 군사들은 일제히 공격하였습니다. 20만의 고려군이 10만의 거란군을 습격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거란군은 얼마 없었습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귀주대첩이리고 합니다. 비록 수적으로 압도할 수 있었지만 고려군의 피해가 별로 없었기에 대첩이라고 합니다.

 

84세에 세상을 떠나다.

현종은 귀주대첩의 영웅인 강감찬을 영파역 까지 나와 환영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검교 태위, 문하 시랑 평장사, 천수현 개국남의 벼슬을 내리고 추충협모안국공신의 칭호를 내려주었습니다. 벼슬에 스스로 물러나기를 반복하다 1030년 문하시중의 자리까지 임명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1년 뒤 84년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죽는 순간까지 나라를 걱정하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강조와 같은 역적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거란의 대군이 쳐들어와 나라가 위급할 때 강감찬 장군이 없었더라면 이 나라는 어찌되었을 것인가' -고려사절요-

 

 

 강감찬(장군)의 인물 연표

 

948년 강감찬은 금주(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태어났다. 

954년 7세 때 아버지인 강궁진에게 학문과 무예를 배움.

964년 17세 아버지가 죽자 강감찬은 김장길의 양자가 되었다. 집을 떠나 10여 년 동안 세상을 두루 다님.

983년 36세 적지 않은 나이, 과거에 응시하여 제술과에 장원급제함.

992년 45세 정 4품 벼슬인 예부 시랑에 오름,

993년 46세 거란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옴. 강감찬은 거란과 싸울 것을 주장함.

1010년 63세 거란 성종이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옴. 강조 사후 신하들이 거란에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강감찬 홀로 거란과 싸울것을 주장함. 현종을 남으로 피신시킴. 

1011년 64세 국자, 제주가 됨. (국자학의 校長 교장) 다시 한림 학사 승지로 승지함.

1012년 65세 동북면 행영 병마사가 되어 국방에 힘씀.

1014년 67세 중추사로 승진함. 군사 훈련에 힘쓰는 한편, 이따금 고려 땅으로 넘어오는 거란군을 물리침.

1016년 69세 이부상서로 승진함.

1018년 71세 서경 유수 및 내사시랑 평장사가 됨. 현종은 임명장 뒤에다 거란의 2차 침입 때 세운 그의 공적을 찬사하는 글을 써서 내림. 서북면 행영 병마사가 되어 거란의 침입에 대비함.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옴. 이 때 상원수로 출전하여, 흥화진에서 강물을 이용하여 거란군을 크게 무찌름.

1019년 72세 강감찬은 개경 함락에 실패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소배압의 군대를 귀주에서 무찌름.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고 한다. 현종은 영파역 까지 나와 강감찬을 환영함. 검교태위, 문하 시랑 평장사, 천수현 개국남의 벼슬과 작위를 받음. 추충협모안국공신의 칭호를 받음.

1020년 73세 왕의 허락으로 벼슬에서 물러남. 특진 검교 태사, 천수현 개국자의 벼슬과 작위를 받음.

1029년 82세 나라의 왕비 태세가 허술함을 걱정하여 성을 쌓을 것을 건의함.

1030년 83세 문하 시중으로 임명됨.

1031년 84세 세상을 떠남.

 

 

출처 : 갤러리
글쓴이 : 행동하면서 실천하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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