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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로 '손예진'을 넘어선 손예진

최덕근 2016. 8. 12. 18:22
  • 세계닷컴
덕혜옹주로 '손예진'을 넘어선 손예진

“이 영화가 품고 있는 감정선이나 진정성을 드러내는 게 더 중요했어요. 설령 제 모습이 아쉽게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다지 신경 쓸 게 못됐죠. ···그토록 그리워하던 엄마(양귀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는 장면의 경우 여배우의 얼굴이 부각되면서 감정을 보이는 게 낫다고 여기기 쉽지만 이번 영화에선 오히려 슬픈 뒷모습이 더 인상적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마침내 손예진이 일을 냈다. 허진호 감독의 새 영화 ‘덕혜옹주’를 통해 작심한 듯 그간 벼르던 연기 인생의 승부수를 띄웠다.

손예진은 ‘덕혜옹주’가 자신에게 “생각의 힘을 키워주고 사고의 영역을 넓혀준 영화”라고 말한다. 그는 “여전히 척결되지 않은 일제 잔재들이 오히려 세상의 갑이 되어 있다”며 “치욕을 잊는 민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덕혜옹주는 나라를 잃은 암흑기, 일제와 친일파의 정치적 도구가 되어 열 세 살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 강제 결혼을 해야 했던 슬픈 역사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영화는 권비영 작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역사가 잊고 나라가 감췄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이덕혜의 삶을 조명한다.

손예진은 객석을 향해 결코 어떠한 감정도 강요하지 않은 채 역사의 격랑 속에 비운의 삶을 살다간 덕혜옹주의 한과 그리움을 스크린 가득 풀어 놓는다.

조국이 광복된 뒤에도 왕가의 부활을 경계한 이승만 정부에 의해 귀국을 거부당한 덕혜가 바닥에 고개를 떨구고 온몸으로 오열하는 장면에서는 손예진의 얼굴 위로 슬픈 하회탈이 보인다. 여배우 손예진을 넘어서 배우 손예진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영화 ‘덕혜옹주’의 한 장면.
“제 영화를 보면서 울어보긴 처음이에요. 배우가 자기 영화를 보면서 운다는 것이 그다지 예쁜 모습은 아니겠지만 마지막 귀국 장면에서 눈물이 펑펑 나오더라고요.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과 긴 세월의 흐름, 그리고 저를 돌아본 지점들이 한데 겹치면서 감정이 복받쳤나 봐요.”

공항 입국장에 들어서면 이미 노파가 된 궁녀들이 덕혜옹주를 맞이한다. 허 감독은 이 장면이 떠올라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제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그토록 슬펐다면서 눈물을 흘릴 만큼 집중해주신 단역 할머니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이 장면은 찍을 때도 슬펐지만 영화로 볼 때도 몹시 슬퍼요.”

옹주는 궁녀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로 돌아온다. 등도 살짝 굽고 혼자 걸을 수 없어 부축을 받는데, 손예진은 힘없는 몸짓 연기마저 실감나게 보여준다.

“나라가 망하면 별 꼴을 다 당하는 겁니다. 암울한 시대를 굴욕적으로 살았습니다. 극중 덕혜가 말합니다. ‘저는 조선의 옹주로서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지 못했어요’라고. 어찌 그만의 잘못이겠어요. 여전히 척결되지 않은 일제의 잔재들이 오히려 세상의 갑이 되어 있어요. 치욕을 잊는 민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게 생각의 힘을 키워주고 사고의 영역을 넓혀준 영화예요.”

그는 덕혜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나 옹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한 여자로 생각하고 연기에 몰입했다고 말한다.

“실존 인물이긴 하지만 기록이 많지 않고, 본인의 의지와는 다른 수동적 삶을 평생 살았다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나 답답했어요. 노후에 떨리는 손으로 쓴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라는 글귀를 보는 동안 덕혜의 심정이 전해지더라고요. 기나긴 외로움과 서글픔 ···. 한 여자로 바라봐도 마음이 아픕니다. 사랑 한 번 제대로 못해 보고 살다간 ···. 영화에서는 장한(박해일)이 지켜주지만 현실에서는 아무도 덕혜를 지켜주지 않았잖아요.”

영친왕의 상하이 망명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장한은 덕혜옹주와 함께 바닷가 안전가옥으로 피신한다. 감자를 삶아 먹는 등 두 사람의 애틋한 감정이 잠시 흐르는 대목이다.

“그 어떤 멜로보다 좋았어요. 허 감독님 특유의 멜로가 다른 형태로 표현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찍는 동안 이 부분은 멜로영화라고 생각하며 매달렸어요. 허 감독님은 배우를 힘들게 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진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니라고 분명히 얘기하시지만, 대개 배우를 믿고 촬영해요. 갇힌 틀이나 규격을 제시하지 않죠. 가만히 두면 신이 난 배우들이 더 좋은 연기를 토해낼 것이라고 믿는 분입니다.”

손예진의 연기에선 이제 여유가 묻어난다. 즐기면서 촬영에 응할 줄도 알고 책임감도 커졌다. 흥행도 고려할 만큼 중견으로 성장했다. 일로써 연기가 주는 내면의 무게감 또한 넉넉히 견뎌낸다.

“연기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어요. 화려한 스타를 꿈꾸기보다 그냥 연기가 좋아서 ···. 행복한 순간은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것 먹을 때, 잠을 푹 자고 일어났을 때, 오늘 촬영 없다고 연락 왔을 때죠. 하하하. 단순해졌어요. 다른 것 생각 안 하고 오로지 연기만 하고 싶어요. 그간 하고 싶은 연기를 좇다보니 다양한 배역들을 두루 해온 것 같아요. ‘느낌’을 주는 연기라면 앞으로도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