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금 번역하고 있는 브라이언 피어스 신부의 [우리 함께 걸으며]에서 세례성사에 관한 장에서 재미있는 생각들 몇 가지 나누려고 합니다.
에크하르트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하느님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재미있는 상징을 사용합니다. 그의 저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하나이지요.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위대한 조각가는 나무나 돌로 인물상을 만들 때, 나무나 돌 안에 무엇을 덧붙여서 인물을 만들어 넣지 않는다. 오히려 나무 안에서 인물을 은밀하게 숨기고 있던 부분들을 조각칼이나 끌로 들어낸다. 나무에게 어떤 것을 보태어 넣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무가 원래 지니고 있는 인물상이 모습을 나타나도록 조각칼로 나뭇결을 벗겨낼 뿐이다. 그러면, 나무 밑에 숨겨져 있던 인물상이 나타나서 빛을 발하게 된다.
브라이언 신부는 이 상징적인 비유가 세례성사의 기본적인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는 명쾌하고 통찰력이 있는 은유라고 생각한답니다. 우리가 나무이지요. 나무인 우리는 깊은 내면 안에 궁극적인 실재인 하느님의 본래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세례의 물 속에 잠기는 것은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추구하고 깨닫는 여정에로의 출발이지요. 진정한 자아는 바로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에 하느님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가 그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영적 여정으로의 출발이라는 말입니다.
에크하르트는 세례성사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느님의 불에서 이는 불꽃을 희미하게 감지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불꽃은 불에서 튕겨 나오지요. 그래서 불꽃은 에크하르트가 우리가 하느님의 분신임을 나타내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이미지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인식하고 어루만지는 것이랍니다. 브라이언 신부는 세례를 불교에서의 각(覺)과 비슷한 체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자기 수행의 결과로 인생의 전환을 이루는 각(覺)의 체험과는 달리, 세례는 성령에 의해 어루만져짐으로써 새로운 영적 여정을 출발하게 됩니다. 세례는 긴 영적 여정의 시작일 뿐이지요.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점차적으로 우리는 우리 깊은 내면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본성을 조금씩 알아채게 됩니다. 우리는 위대한 조각가이신 하느님께서 조심스럽게 우리 본래의 모습을 덮고 있는 부분들을 쪼아내고 들어내어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보게 해 주실 것이라는 신뢰를 배워나가는 것이지요. 결국 아름다운 조각품은 완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예수님이 당신 스스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분을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가 체현해야 할 영적인 자각을 예시합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요르단 강물에서 나왔을 때,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고 하늘로부터 목소리가 들여오는 것을 들으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 10-11) 아마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깊이 아로새겨진 사건일 것입니다. 그 목소리는 그를 놀라게 했지만 그는 아주 부드럽고 친밀한 사랑의 분위기가 감도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정일우 신부님은 예수님에게 이 체험은 너무나 내적으로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는 내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그는 하느님을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르는 애칭인 압바(우리말에 아빠에 해당)라고 부르신다고 하지요. 우리는 예수님이 온전히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잠시 잊고 그는 하느님이시니까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인간이셨기에 당신이 누구이신지 계속해서 식별을 통해 아셔야 했지요. 예수님에게 세례 체험 안에서 하늘로부터 들여온 소리는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그 의미를 기도를 통해 식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광야로 가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례 체험 안에서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듣고 기도 안에서 그 의미를 헤아리면서 당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와 아버지가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되지요.
프랑스에서 태어나 인도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낸 베네딕트회 신부인 스와미 아브히쉬크타난다는 예수님의 생애에 깊이 가로새겨진 이 세례 체험에 대해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분리가 사라지는 체험을 하신 것은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였다. 성령이 그에게 내려오셔서 그를 충만히 채우심으로써 그 안에 있던 모든 분리를 없애주셨다. 성령 안에서 그는 자신을 ‘아들’이라고 부른 목소리를 이해했고, 그는 ‘압바’라고 응답했다. 그가 ‘압바’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이제 “그와 나는 완전히 하나이다.”라는 뜻이었다.
정일우 신부님의 이해와 똑같지요.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은 그가 단지 살과 피를 지닌 육체 이상의 어떤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존재 깊은 곳에서 하느님이라는 체험이었습니다. 그와 하느님 사이에 분리가 없습니다. 그와 하느님은 온전히 하나입니다. 이 신비로운 하나 됨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세례성사는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도 하느님의 존재 안에서 깊숙이 들어가서 그 안에 잠기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예식입니다.
중세 도미니크수녀회의 신비가인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그녀의 저서 [대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물고기가 바다 안에 있고 바다가 물고기 안에 있는 것처럼 나는 평화의 바다 안에서 영혼 안에 있고 영혼이 내 안에 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 후에 고별사를 하시면서 외치신 신비스러운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요한 14, 11)
세례성사의 목적은 우리가 하느님께로 향한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내면의 자유를 향한 순례입니다. 이 순례의 목표가 예수님처럼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이듯이 하느님과 하나입니다.
마지막으로 에크하르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그런데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이 구체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고, 그래서 나도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강생의 신비가 나에게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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