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모음

병에게

최덕근 2007. 8. 21. 20:50
 

“병에게”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 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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