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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인문학과 예술, 왜 저항않는가<세계일보>

최덕근 2011. 2. 12. 15:41

[문화산책] 인문학과 예술, 왜 저항않는가<세계일보>
  • 입력 2011.02.11 (금) 19:25

인문학과 예술이 21세기 대중사회로부터 소외당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1940년대 이후 마르쿠제, 앙리 르페브르 등 사회학자에 의해 예측돼 왔다. 앙리 르페브르는 자신의 저술 ‘현대사회의 일상성’을 통해 “광고 선전 문구가 시를 대신할 것이다. 광고는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이다. 고전적인 의미의 인텔리겐치아(지식인)는 주변으로 밀려난다. 소비 조작적 대중사회는 결국 종합적 테크노크라트(전문가)의 프로그램에 의해 운영될 것이다”고 예고했다. 

이윤택 영산대 교수·극작 연출학

한국은 언제부터인가 초고속 인터넷의 진원지가 됐고, 서울은 세계 최대의 하이테크 이미지 천국이 됐다. 뉴욕에 가도 현란한 인공 두뇌적 이미지가 불야성을 이루는 곳은 42번가 부근 일대로 제한된다. 그러나 눈치 빠르고 손재주가 뛰어난 기마민족의 후예가 보여주는 속도전은 한국사회를 일약 소비 조작적 대중 이미지 창출의 세계 중심지로 부상시켰다. 일본과 중국을 거쳐 동남 아시아 전역에 이르기까지 번져나가는 한류야말로 메이드 인 한국의 대중 이미지가 제공하는 파급효과일 것이다. 우리는 그 덕분에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정치적 불안 속에도 신기할 정도로 잘 버텨내고 있는 듯하다. 덕분에 관광산업이 발전하고 스포츠 강국이 됐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독문학과, 불문학과, 철학과 등 고전적 인문학 분야는 폐과의 순서를 밟고, 무용과 회화과 등 순수 예술 창작과도 같은 운명을 맞이한다. 대신 학문과 예술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갖가지 소비 조작적 기술 습득 과정이 대학에 밀고 들어온다. 서점은 문을 닫고 학자와 예술가는 어느덧 주변인으로 밀려난다.

이 엄청난 변화의 21세기에 젊은 여성 단편영화 작가가 서울 외곽 다세대주택 밀집지역 월세방에서 굶어 죽었다. 그녀가 제 손으로 써서 이웃집 대문 앞에 붙인 쪽지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가 유서가 되고 말았다.

그건 바로 소비 조작적 대중문화의 덧없는 놀이와 이미지에 편입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제 갈 길을 가려 하는 젊은 예술가의 고립된 저항과 희생으로 읽혀진다.

이런 불균형 사회를 조장한 사회적 모순은 어디에 있는가. 그 모순을 향해 인문학은 저항의 활력을 되찾아야 하고, 예술은 세상을 되비추는 거울로 맞서야 하지 않을까.

고대로부터 인문학과 예술을 담당했던 창조적 주체들은 저항의 에너지를 삶의 동력으로 사용했던 인간이었다. 운명에 대한 거부의 의지가 그리스 비극을 창조했고, 중세기에는 제도적 권력으로 작용했던 종교에 저항한 이단아였다. 세속적 시대에 세속화에 저항했고, 산업화 사회에서 산업화에 대한 저항의 활력이 인문학의 길을 열었다. 제국주의에 저항한 평화주의자였고, 공산독재에 저항한 자유주의자였고, 국가 자본주의에 저항한 아나키스트였다.

왜 지금 여기 인문학과 예술은 저항하지 않는가. 저항의 대상을 잃어 버렸다고들 말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30여년간 지속된 군부독재와 민중 저항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청산하고 화해와 공존의 시대를 열었다. 현대 한국의 인문학과 예술 또한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그 궤를 같이해 왔다. 그래서 대립과 긴장의 시대가 해체되면서 저항의 활기 또한 사라졌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앙리 르페브르가 이미 50여년 전에 예고했던 ‘보이지 않는 적’이 우리들 일상에 스며들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소비 조작적 대중문화가 무제한 방출해내는 덧없는 놀이와 입담과 이미지다. 우리는 지금 사방의 적들에 둘러싸여 있다. 무엇보다 이런 무의미한 일상을 내버려두는 나 자신이 바로 나의 적이다.

이윤택 영산대 교수·극작 연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