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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을

최덕근 2005. 10. 12. 19:36

경인일보의 '시침분침'이라는 꼭지에 실은 글입니다. 5주에 한번 글을 써주기로 했지요.

 

 

  ‘희망’이 여무는 가을


유리창을 여과한 맑은 가을 햇살이 방안 가득 고인다. 그 풍성한 햇살에는 잘 익은 가을 냄새가 가득하다. 하늘을 파랗게 하고, 단풍을 빨갛게 하고, 들판을 노랗게 하고, 우리 마음을 그립게 하는 가을날의 햇살은 굳어버린 마음까지도 곱게 물들일 것 같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녘을 보며 우리 땅과 우리 몸은 둘이 아니라는 ‘신토불이’를 다시금 생각한다. 농약과 방부제로 오염된 외국농산물이 무분별하게 우리 농산물을 밀쳐내기 시작하자 우리 땅 우리 몸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신토불이를 목청 높였다. ‘신토불이’란 우리 농산물이 좋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몸과 땅은 둘이 아니듯 몸은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몸과 땅은 하나이고 몸은 마음을 떠나서는 살 수 없으니 결국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이 서양 그리스 철학의 기본개념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의 사고와 동양사상에서의 인간은 몸과 마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존재로 여겼다. 몸과 마음이 하나인지 분리된 것인지에 대한 해답은 동서고금을 불문한 철학자들의 영원한 숙제로 미루어 두더라도 과연 우리의 삶에서 몸과 마음은 어떤 관계일까?  

철도국의 한 직원이 장거리 수송열차의 냉동실 칸에 들어갔다가 밖에서 문이 잠기는 바람에 그곳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냉동실 문을 열어보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철문은 워낙 견고해서 소리를 지르고 힘껏 두드려도 밖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냉동실 칸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얼어 죽을 것이라는 공포가 그를 덮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은 점점 굳어져갔다. 죽음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남기고 싶었고 냉동실 벽에다 자신의 심정을 기록했다.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이 없다. 점점 몸이 식어가고 있다……. 그래도 기다리는 수밖에……. 몸이 얼어가고 이제는 정신도 몽롱하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여기서 죽는가 보다…….”

그가 냉동실 칸에 갇혀 있었던 시간은 불과 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뿐이었다. 다른 직원이 그 냉동실 칸을 열었을 때 그는 몸이 빳빳하게 굳은 채 죽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냉동실 칸은 오래전에 고장이 나 있어 냉동장치가 전혀 작동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내의 공기는 충분하고 실내온도는 섭씨 13도였다. 러시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상식적으로는 섭씨 13도의 온도에서 인간이 얼어 죽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죽게 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절망감이리라. 냉동실 칸에 갇혔고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자신은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이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절망을 느낀 마음은 몸에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고유가시대, 어려운 경제로 여기저기서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풍요속의 빈곤이라고 했던가, 못 먹고 못 살던 옛날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모든 것이 풍요롭지만 그늘진 땅 한켠에서는 여전히 밥을 굶는 아이들이 있고 굶어죽는 노인들이 있다. 통계에 의하면 7초에 세계인구의 한명이 굶어죽어 간다고 한다.  실제로 경제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레 겁먹고 절망만 한다면 혹 우리 주위에도 고장 난 냉동실 칸에서 얼어 죽은 철도직원의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의 비약일까.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을 지니고 살면 우리의 몸은 그 마음을 따라가게 되고, 삶 또한 그렇게 닮아간다. 삶은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서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아낌없이 비추는 가을 햇살은 얼어붙으려는 우리 마음을 다독이는 작은 위로인 듯 하다. 가을햇살에 곡식이 여물 듯 우리 마음도 그렇게 여물어 가기를 소망한다. 

이 고운 가을햇살이 어둡고 그늘진 땅 틈새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환하게 비추어 저마다의 튼실한 ‘희망’의 열매하나 추수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가을날을 꿈꾼다.

출처 : 성 이냐시오의 영성
글쓴이 : 류해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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